甲(가해자)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신장 178cm, 체중 70kg의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甲은 재학중인 학교를 포함해 부산 5개 중학교 일진회 중 짱으로 불렸으며, 모든 학생들이 무서워하여 눈도 마주치지 않고 甲을 피해 다녔다. 甲과 친한 친구가 아니면 말도 하지 못하고, 시험기간에는 더 예민해져 자신의 공부에 방해된다면서 같은 반 학생들이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도록 강요하였다고 한다.
乙(피해자)이 2교시 수학 수업을 마친 후 책을 다른 동급생에게 전달하러 복도를 통해 이동하던 중, 甲의 몸에 책이 약간 스쳤다. 甲은 몸을 스친 乙에게 '자신에게 책을 스친 이유 5가지'를 대라고 하였으며, 乙이 각각의 이유를 하나씩 말할 때마다 甲은 乙을 주먹으로 가슴을 가격하였다. 그리고 총 5대를 맞고 들어가는 乙을 다시 불러 얼굴과 가슴을 심하게 가격하였다.
乙이 쓰러지자 반 친구들이 甲의 일방적인 가격을 말리려 하였지만, 甲은 심한 발길질을 했고 “넌 죽어버려야 해!”라고 외치며 의자까지 던졌다. 이 때, 乙은 의식을 잃었지만 甲은 쓰러진 乙을 계속 구타하였다.
결국 乙은 병원으로 실려갔고, 거의 죽은 상태로 간신히 기계 호흡을 하고 있었다. 외상이 없는 상태에서 폐가 2/3이상 파열되었고 지주막하출혈로 머리 전체에 피가 고여 있어 하루 빨리 수술이 시급하였으나, 죽은 상태와 다름 없는 상태에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여서 4일 동안 그 상태로 버티다가 사망하였다.
2011년 1월 21일 밤 12시, 대전지방경찰청 경찰간부 이모씨에게 모친으로부터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화는 바로 끊어져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씨는 모친이 살고있는 아파트를 찾아갔고, 그 곳에서 손과 발이 결박당한 모친을 발견했다. 많이 이상했지만 모친은 딱히 외상이 없었고 도둑맞은 물건도 없어 이씨는 신고하지 않고 모친과 함께 잠을 잤다. 일어나보니 모친이 숨을 쉬지 않았고, 부검결과 모친은 이미 늑골골절로 인한 흉강내 출혈로 사망한 뒤였다.
사실 이
사건은 이씨가 모친과 결탁해 일으킨 보험 범죄였다. 본래 의도는 어머니는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자고, 아들은 어머니를 부상 입혀 상해 보험금을 타내려고 했던것. 근데 이게 너무 과해서 결국 사망해버리고 만것. 7.7kg에 달하는 최중량 불링공을 약 7차례 허리에 떨어뜨렸다는데...
어찌보면 끔찍하고 어찌보면 어이없고 어찌보면 안타까운 사건으로, 사실 이씨 본인은 보험금을 수령할 생각도 없었다. 어머니도 빚을 지고 있었는데, 어머니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아들한테 보험 사기 계획을 짰던것. 그리고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다치실 방법을 찾다가 수면제를 쓰게됐고, 한방에 다칠수있게 최중량 볼링공을 고른게 종합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화근이 된것이었다.
이씨 측 증인으로 나온 윤모씨도 이씨는 평소 극진한 효자였고 만약 죽을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면 절대 이런일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며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구형 받았으나, 이씨가 국민참여재판을 원해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10시간이 넘는 재판 끝에 징역 3년이라는 이례적일 정도의 판결이 나왔다. 존속상해치사의 경우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징역인걸로 형법에 나와있음에도, 이씨가 고의성이 없었고 당시 이씨의 절박한 상황을 이유로 들어 양형의 이유를 밝혔다
1975년 전라도, 경기도, 서울을 돌며 1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마.
폭련전과 2범인 김대두는 출소후 돈이 궁했고 돈을 빼앗기 위해 1975년 8월 12일 첫
살인을 저지르고 같은해 10월 8일 검거되기 전까지 55일 동안 마구 돌아다니면서 17명을 살해했다.
첫
살인후 순천행 기차를 탔다가 우연히 만난 교도소 동기와 같이 돌아다니며 두번째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후 이렇게 된 바에야 돈이 많은 서울에서
살인을 저지르자!로 의기투합한 둘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뒤 헤어졌다. 어쨌든 김대두는 계속해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런 그는 사소한 실수로 붙잡히게 되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피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청바지에 묻은 피를 보고 의구심이 든 세탁소 주인 하근배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검거 이틀 후 현장검증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히쭉 웃어대는 모습에 전국민이 경악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사이코패스였던걸로 추정. 옥중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수천명을 신자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진심이었는지 사형 판결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지금도 설왕설래가 있다. 만약 사이코패스였다면 진심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결국 사형판결을 받고 이듬해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1년에 벌어져서 세상을 경악시켰던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쉬쉬했던 존속성폭행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
의붓아버지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하던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 (이 의붓아버지는 검찰관계자였다. 의붓딸 이외에도 여러명을 강간한 것으로 추정되나, 검찰 관계자였기 때문에 그때마다 무사할 수 있었다.)
제1심에서는 직접
살인을 한 남자친구 김진관은 징역 7년, 김보은에게는 징역 5년이 선고되었고, 항소심에서 김진관 징역 5년, 김보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선고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적인 경우는 나올 수 없는 형량인데 이는 최상단의 표현처럼 김보은이 피고인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것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1994년 제정된 '성폭력 범죄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담으로 복역 이후, 김보은 양과 남자친구 김진관 군은 헤어졌다고 한다. (남자쪽 집안에서 엄청난 반대로...)
여자 고등학생을 성추행하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제지하려던 대학생 김지연군(당시 경운대 1학년)이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2003년 8월 24일 새벽 3시 30분 시흥시 신천동의 한 놀이터에서 베트남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인 웬뚜안뚜(24)와 레휘황(29)이 귀가하던 고등학생 한모양(18)을 성추행 하는 것을 보고 이를 제지하려던 김군은 웬뚜안뚜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인천 길병원으로 후송, 치료를 받아 오다 숨졌다. 웬뚜안뚜 일행은 김군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 구속되었다. (실제로 죽었는데
살인미수?)
그후에 보건복지부가 시흥시에 낸 신청에 의해 김군은 의사자로 선정되었다.
사건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 들어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슈화 되면서 주목받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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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아동 황산테러 사건
1999년 5월 20일 오전 11시 경, 대구시 동구 효목동 골목길에서 학원에 가던 6살 소년 김태완 군에게 갑자기 검은 비닐봉지를 든 정체불명의 남성이 나타나 얼굴에 황산을 부은 뒤 달아난
사건. 김태완 군은 얼굴을 비롯한 전신의 40~45%에 3도 화상을 입고 두 눈을 잃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시달리는 채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이다 결국 49일만인 1999년 7월 8일 오전 8시 15분쯤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서 곧바로 도주했고, 대낮이었지만 길에 다른 사람들이 없었던지라 범인을 목격한 사람도 없어서 경찰은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리고 태완 군이 사망하기 직전에 범인은 치킨집 아저씨라고 지목했으나, 지목당한 사람이 무고하다며 유서를 남기고 자살해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00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금리의 한 농가에 살고있던 허 모 양(11)를 불량한 남자들이 납치후 인근 야산에 살해하고 유기한
사건이다. 5월 30일 오전 4시경, 허 양의 집에 강도가 침입해서 허 양의 할아버지를 마구 폭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허양이 고성 소리에 잠에서 깨어 달려나왔다. 그런데 범인은 허양을 납치하고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 후 6월 12일, 인근 야산에서 결국 허 양은 알몸 시신으로 암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허 양의 옷 등 유류품들은 시신이 발견된 야산 0.3km 아래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옷이 벗겨졌다는 이유로 성범죄 가능성도 있었지만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빙성 있는 제보가 없었고, 범인이 금픔 요구 등의 협박전화를 하지 않고 바로 피해자를 살해한후 사라졌으며, 다른 피해자인 할아버지의 일관성 없는 진술로 인해 결국 현재까지 범인을 잡지 못한채 사실상 장기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심지어 가져간 물건도 없고 허 양이 성폭행을 당하지도 않았고 할아버지의 목숨을 노리지도 않아서 목적마저 불명확하다.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이자 사건을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허 양의 할아버지 역시 사건 발생 84일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지병에 범행쇼크의 가능성도 있는 듯 하다. 이로써 더더욱 범인을 잡기가 힘들어졋다. 유일한 가족은 허 양의 여동생뿐인데 2010년 들어 허 양의 집 일대가 대구 테크노폴리스 사업지구로 들어갔기 때문에 집은 철거되었다. 아마 허 양의 여동생은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아버지와 살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범죄조직으로 1996년 검거.
그해 10월 5일, 외제차를 몰고가는 40대 여성을 납치해 금품을 빼앗고 자신들의 아지트인 소금창고에 생매장해 살해했다.
조직폭력배인 조양은을 미화한 소설 등을 읽고 폭력단을 결성하였다고 하며, 그런 이유로 미디어의 폭력성에 의한 범죄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되곤 한다. 또한, 지존파를 모방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막 가는 인생이라고 하여 이름을 막가파라 지었다고 한다.
그들은 폭력단을 결성하여, 남자다운 행동을 한다며 소매치기 및 부축빼기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다. 특히 취객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뒤 돈을 빼앗는 일명 '뻑치기'를 가장 많이 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취객을 무차별적으로 야구방망이나 벽돌 등으로 폭행한 뒤 돈을 빼앗았다고 한다. 또한 부녀자를 납치하여 돈을 빼앗고 풀어주는 등, 살해 이전에도 납치를 빈번히 저질렀던 것으로 밝혀졌다.
주유소를 목표로 3번 강도
사건을 저질렀는데, 이는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와는 달리, 실제
사건은 조직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후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회칼로 위협하여 현금을 강취한 것이다.
1996년 10월 29일, 도난 차량을 검문하던 도중 5명을 검거하게 된다. 도난차
사건의 경우 대개 도난한 차량으로 납치를 하는
사건도 연관되어 따라나오기 때문에, 경찰이 혹시나 해서 차를 훔친것 뿐 아니라 사람도 납치한게 아니냐고 묻자 조직원중 가장 어렸던 17세 이모군이 맞다 납치해서 죽였다고 답변한 바람에
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이후 시체를 묻었다는 현장에 도착하는데, 소금창고 바닥을 파보자 진짜로 나체의 여자 시체가 나왔다. 이상한 점은 목이 꺾여 있었다는 것인데, 생매장하던 도중 구덩이가 너무 얕아서 목을 꺾어서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잔인한 범죄는 당시 지존파 사건과 함께 굉장한 사회적 이슈를 던져주었다.
1990년대 한국에서 발생한 유괴(금품을 노릴 목적으로),살해
사건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유명한
사건. 강렬한 임팩트를 가진 희생아동의 이름과 살해자의 특이한 신분 때문에 더욱 사회에 깊이 각인된
사건이다.
1997년 8월 30일, 살해범 전현주(당시 27세, 여성)는 서울 잠원동에서 영어학원을 나서던 박초롱초롱빛나리(당시 초등학교 2학년, 여아)를 유인, 유괴하는데 성공하고 당일 저녁 총 3차례에 걸쳐 부모에게 공중전화를 통해 2천만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명동의 한 커피숍에서 경찰의 신분 검색에 걸린 후 판단력을 잃고 이성을 잃은 그녀는 박양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 잠든 틈을 이용해 조용히 목 졸라 살해했다.
그녀는 이미 용의선상에 있었기에 경찰은 그녀의 자택 주변을 수사중에 있었고, 이를 지켜보며 의아해한 전 씨의 아버지는 9월 11일 경찰에 자신의 딸(전현주)이 범행 직후인 9월 1일부터 가출 상태임을 알렸다. 결국 통화내역으로 꼬리를 밟힌 전 씨는 9월 12일 신림동의 한 여관에서 검거되었다.
검거 당시 전현주는 임신상태였으며 그 해 2월에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본래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으나 본인의 의지와 달리 모 대학 무역학과를 거쳐 응급구조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는가 하면
사건 2년 전인 25세 때 다시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런 한편으로 틈틈이 총학생회 요직을 거쳤던 것을 보면 남다른 지도력과 교양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낭비벽이 심했던 그녀는 결혼 후 늘어난 씀씀이를 감당하지 못해 3천만원의 빚을 진 상태였고, 박초롱초롱빛나리를 유괴한 이유도 2천만원의 빚을 변제하기 위함으로 드러났다. 당연히 단독범죄였기에 남편은 꿈에도 생각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잡혀갈때 남편은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 주저앉았다고 한다.
나중에
사건 재연을 할때, "현주야! 아니지? 너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해줘!" 울부짖는 듯한 남편의 절규스런 목소리까지 방송을 통하여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검거 후 자필 진술서에서는 전현주씨가 검찰에 검거되기 전 그녀의 부모가 다섯번이나 자살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일을 속죄하는 길은 자살뿐이며 부모도 곧 따라 갈테니 두려워하지 말라며 약국에서 살충제까지 구입했다고. 경찰 조사 도중 전현주씨는 그런 부모가 걱정되었는지 동생에게 부모님을 잘 보살펴드리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당부의 편지까지 쓰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패륜 존속살해범. 당시 나이 23세.
1994년 5월 1백억대 자산가인 한약상 부부의 집에 불이 나서 부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 화재 사고로 처리했으나 형식적으로 실시한 부검에서 화재현장에서 발견된 시신이 40여군데 난자된 상태를 발견하고
살인사건으로 간주, 공식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결국 당시 여러 정황을 봐서 면식범의 소행으로 파악하던 경찰은 박한상의 목에 피가 묻었다는 간호사의 증언과 박한상의 다리의 이빨자국을 이야기한 친척의 제보로 수사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영화 '공공의 적'의 악역 조규환의 모티브가 되었다.
2012년 2월 11일 전라남도 보성의 목사 박 모씨 사택에서, 박 목사의 네 자녀 중 막내딸을 제외한 3명이 숨진채 발견된
사건.
2월 초부터 조카들의 소식이 없는 것을 궁금해한 아이들의 고모부 이 모씨가 2월 11일 교회로 찾아가 아이들 방에 들어갔다가, 목사의 큰딸(10세), 큰아들(8세), 작은아들(5세)의 시신이 이불에 덮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부모인 목사 박 모씨 부부가 이를 신고하지 않고 부활을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는 것.
경찰 조사 및 국과수 부검 결과 박 목사의 자녀들은 지난 1월부터 감기 몸살을 앓아 1차례 병원 진료를 받았으나, 그 후 박 목사가 자녀들의 병이 마귀 탓이라며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강제적인 금식 기도와 구타를 수차례 행한 것이 자녀들의 사인이라고 한다.
박 목사의 자녀들은 열흘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성경 구절 중에 자녀를 채찍으로 훈육하라는 구절에 따라 허리띠로 때리기도 했다고.
2007년 8월 31일 72살 어부 오종근이 전남 보성으로 여행 온 10대 남녀 2명을 자신의 배에 태우고 나서 여성을 성추행하기 위해 남성을 먼저 바다로 밀어 숨지게 하고 저항하던 여성도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데 이어 9월 25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20대 여대생 2명을 살해한
사건.
첫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경찰과 해경은 타살 증거를 찾지 못해 두 사람을 동반자살로 인한 추락사로 판단했다. 그렇게 수사가 종결되었다가….
두번째
사건에서 덜미가 잡혔다. 선박 내부를 수색하자 여대생 피해자의 신용카드 및 볼펜,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고 용의자로 지목하여 집에 숨어있던 노인을 체포했다.
이
사건이 특별한 이유는 다름이난 가해자가 70대 노인이고 피해자가 20대 젊은이였다는 사실. 보통 그 반대로 젊은이가 노인을 살해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지만 이
사건은 노인이 젊은이를 살해한 보기 드문 케이스라서 주목을 더 받았었다.
사실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아주 불가능한 상태도 아니였는데, 가해자는 고령이라고해도 오랫동안 어업에 종사해와서 힘이 매우 센데다가 승선 상황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지만, 피해자들은 수영도 못하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고 배 위에서의 상황이 익숙하지도 않았던지라 가능한 일이었다.
2010년 4월, 부산에 거주하는 40대 여성 S씨는 6월 중순, 대구의 한 여성쉼터에서 소개받은 20대 여성 K씨를 데리고 왔다. S씨는 자신을 부산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어린이집 원장이라고 말하면서 K씨를 어린이집에 고용하겠다고 해서 부산에 데려온것. 그리고 K씨는 그 다음날 새벽 죽었다. S씨는 K씨를 화장했다.
문제는 그 뒤부터 일어났다. S씨는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어둔 상황이었는데 죽은 K씨를 자신인것처럼 속여서 생명보험금을 타내려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보험회사의 신고로 S씨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S씨는 경찰이 체포하러 온 순간에도 자신을 극구 죽은 K씨라고 주장하면서 1시간을 넘게 버티다가 결국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경찰의 조사 결과 S씨는 4월부터 여성쉼터, 독극물, 사망신고 절차등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실제로 독극물을 구입했으며 5월부터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시작해 총 24억원의 생명보험금을 탈수 있는 보험 계약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6월에 대구의 여성쉼터에서 K씨를 데려온뒤 살해했다는 것이 경찰과 검찰의 조사 결과였다.
2011년 5월, 1심 재판부인 부산지법 재판부는 S씨에 대해서 "피해자의 사인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자연사나 자살했을 가능성이 작다”며 “피고인이 이
사건 전에 거액의 보험에 가입하고 인터넷으로
살인방법 등을 검색한 점 등으로 미뤄
살인혐의가 인정된다"라고 판단했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 노숙자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편취하려 한 것은 저급하고도 비열한 범죄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도 뉘우치지 않아 사회로부터 영구히 격리하는 형을 선고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하여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다만 시체를 화장한것을 시체은닉죄로 볼수는 없다라고 판단하여 그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 2월, 2심 재판부인 부산고법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유인해 살해했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심이 들지만 공소사실에 구체적인 범행방법이 적시돼 있지 않고 사망원인이 객관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타살을 인정할 증거도 없다"고 하며 S씨에게 사기와 시체은닉죄만을 적용해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S씨가 의도적으로 보험사기를 위해서 여성 노숙자를 속여서 데려온뒤에 그녀를 살해한후 화장하여 증거를 없애고 K씨의 신원을 도용해 보험금을 타내려다가 발각된것이라 주장했으나 2심 재판부는 직접적인
살인의 증거가 없는 이상
살인혐의를 둘수 없다라고 판단해
살인죄는 인정하지 않은것이다. 검찰은 즉각 대법원에 항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대법원은 실체적 법적 진실을 가린다기 보다는 2심 재판의 판결이 법리적으로 타당했는가를 판단하기 때문에 결국 판결이 뒤집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왜냐하면 2심 재판부는 증거에 입각한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물적 증거가 정황 증거에 우선한다는 법리원칙상 2심 판결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
전문가들은 이런 판결이 나오게 되면
살인후에 시체를 온데간데 없이 처리해버리면 설령 범죄가 발각되더라도
살인죄 인정은 받지 않는다라는 것을 범인들이 악용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살인이 의심되는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황증거만 놓고 본다면 S씨의 살인은 분명하지만 직접적 물적 증거가 없는 이상 대법원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두고 고심할것이라는게 법률 전문가들의 견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살인의 물적 증거를 찾을 가망이 없다는것. 물론 S씨가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정황증거는 차고 넘치나 S씨는 이를 매우 논리적으로 잘 빠져나가고 있다.
8명의 남고생 가해자들이 여고생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 집단 성폭행하고 화재로 숨지게 한
사건이다.
가해자 측과 그 부모들은 "합의하에 성관계" "피해자쪽서 돈 요구"등 법정에서 파렴치한 진술 쏟아내었다고 한다.
서울고법은 미성년자인 1명을 제외하고 가해자 7명에게 특수강간과 과실치사죄로 실형을 선고했다.
B군 형제는 장기 4년 단기 3년의 형량을 판결 받았다. C군은 징역으로 형량이 높은 장기 5년 단기 4년을 선고받았다. D군은 부모와 함께 A양 부모를 찾아 사과를 거듭하고 합의를 해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참고로 네티즌들의 지탄을 받았던 B군 형제의 부모는 치과의사이며,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모 정치인으로, 치과는 2010년 3월부터 영업을 하지 않고 있으며, 부부 모두 행방불명 상태라고 한다.
관련기사 :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18/2010021800036.html
2001년 2월 한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사건 자체는 일반적인
살인사건이지만 당시 워낙 유명하던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이라 한국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82년도 생인 영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화전과 약초캐기만으로 살아가던 산골소녀였다. 그러던 영자와 그의 아버지는 한국의 시골과 오지를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고 2000년 7월 KBS 2TV 인간극장 '그 산속에 영자가 산다(5부작)'을 통해 이후 엄청난 유명인이 되었다. 이후 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그녀를 위해 수많은 후원이 이루어졌으며, 영자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초등과정 검정고시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유명세를 통해 이동통신회사인 LG텔레콤의 CF까지 찍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TV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후 인간극장의 인기는 최고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훈훈하게 이 에피소드는 끝나는 듯 했다.
영자가 서울에 상경하여 검정고시 준비에 열심이던 2001년 2월 12일 영자의 아버지가 산골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시신은 왼쪽 쇄골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으며 콧등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처음 경찰은 초동수사에서 영자의 아버지가 지병으로 죽은 것으로 결론내렸다가 정말이지 뒤지도록 까인 후 타살로 결론내리고 수사를 실시하였으며, 결국 2001년 3월 13일 50대의 남자 양모씨를 용의자로 구속하였다. 양모씨는 영자와 그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 산 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범행이 용이하다는 점을 파악한 후 CF출연료와 후원금을 노리고 2001년 2월 9일 영자의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돈 한푼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전국민이 경악하던 것도 잠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영자의 후원회장이 소녀의 출연료와 인세를 횡령하여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자는 서울로 올라온 후 후견인에게 돈을 모두 뺏기며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당했던 것. (인터넷에 영자가 아버지 살인자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루머가 떠도는데 육체적인 학대는 살인자가 아니라 그녀의 후원회장이 저지른 일이다.)
이 두 사건 이후 영자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속세를 떠나 산사로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1999년 1월 19일, 강원도 삼척시의 한 비포장도로에서 그랜저승용차가 먼지를 날리며 추월했다는 이유로 엽총을 발포,
신혼부부를 살해했던
사건.
신혼부부뿐 아니라 우연히 지나가던 택시 운전사도 목격자 제거를 위해 총을 쏘았고, 운전사는 부상을 입었다.
피의자 정씨는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그랜저승용차 안에 있던 지갑을 꺼내 야산에 버리는 치밀함도 보여주었다.
총을 쏜 정씨는 강도강간 등으로 이미 전과 6범이었고, 동승자 한씨는 전과 5범. 96년에 술집을 운영하면서 동업자 사이가 되었고, 꿩사냥을 위해 강원도에 왔다가 앞에 그랜저가 추월하자 이에 분노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목격자가 있긴했으나 단순히 지나갔을 뿐이었고,
사건 자체가 당시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극단적인 우발적 범행이어서 범인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경찰들도 수사 초기에는 원한관계로 인한 범죄로 생각하고 조사했었을 정도. 범행수법의 잔인함도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우발적으로 저질렀을리 없다는 생각을 하게 했었고...단서가 워낙 부족해서 미제
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며 보도 되기도 했었으나...
사건이 발생한지 6개월만에 경찰은 삼척 신혼부부 살인사건의 범인이 수원에 숨어있다는 첩보를 받고 정씨와 한씨를 검거했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엔 너무도 가벼워보였던 범행동기가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지존파와 막가파를 떠올렸던 사람도 많았다.
2000년 대법원은 정형구에게 사형, 한준희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프랑스인들이 모여사는 서울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벌어진 영아살해
사건.
2006년 7월 23일 오전 11시 무렵 서래마을에 거주하는 장 루이 쿠르조(당시 40)가 냉장고의 냉동실에서 비닐봉지에 싸인 영아의 사체 2구를 발견하여 방배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여러가지 의혹이 있었으며 필리핀인 가정부 L씨(49)등이 조사를 받기도 했으며 여중생으로 보이는 소녀를 목격한 적이 있다는 둥의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달 28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DNA 분석으로 쿠르조가 영아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쿠르조는 이미 프랑스로 출국한 뒤였다.
8월 7일 국과수의 두 번째 DNA 조사 결과 쿠르조의 집에 있던 부인 베로니크(39)의 칫솔과 귀이개 등에서 나온 DNA가 영아의 그것과 일치했다.
2003년 자궁적출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조직세포 표본을 확보해 숨진 영아들의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도 얻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8월 22일 프랑스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의 DNA 분석 결과는 믿을 수 없다"며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이에 동조하는 기사가 많았다고 한다.
쿠르조 부부는 동년 9월 26일 자국 경찰의 DNA 검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는 국과수에서 한 것과 일치했다. 프랑스 검찰은 지난 10일 쿠르조 부부를 긴급 체포했다. 11일 베로니크는 "남편 몰래 한 단독 범행"이라고 프랑스 경찰에 범행을 인정했다. 어떻게 남편이 공범이 아닐 수가 있냐는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만 베로니크의 임신 7개월 중일 때 사진을 보면(그것도 수영복 착용) 도저히 임신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임신거부증에 의한 자궁의 성장 방향이 달라져서로 추정.
국내에서 프랑스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는데 큰 몫을 한
사건으로 이때 프랑스 대사관에서는 한국 체류중인 프랑스인들에게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또 제때 출국금지를 못내린 국내 경찰의 잘못도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외국인들이 국내법을 호구로 아는 인식을 제대로 보여주게 되었다.
2010년 3월 22일 그 전모가 드러나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살해 암매장
사건이다. 일본의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과 그 엽기적인 범행 수법이 유사한
사건으로서, 그 해 6월 벌어진 군산 초등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과 수법면에서 유사하고, 역시 6월의 홍은동 여중생 살해 시신 유기
사건과 맞먹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사건의 주동자인 이 모(18)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방 세칸짜리 연립주택에 혼자 살게 되었는데, 정신지체 2급의 장애를 가진 A양이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인터넷 채팅으로 가출을 부추겨 동거하게 된다. 당시 이 군의 집에는 이미 친구인 김 모(18), 강 모(18), 그리고 김 군의 여동생(16)이 같이 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2010년 2월 26일, A양이 김 군과 키스를 한 사실이 드러나고, 그들은 '재판'을 연다며 A 양을 몰아세운다. 이후 20일간 매일 성폭행과 입에 담을 수 없는 가혹행위가 계속되었는데, 그 중에는 이물질을 삽입한 채로 성폭행, 달군 쇠붙이를 이용한 고문, 날카로운 흉기로 찌르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체를 부검한 부검의의 소견에 따르면, 얼굴이 구타로 부어올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A 양은 계속되는 가혹한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사망 3-4일 전부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후 결국 사망하게 된다. A 양이 사망하자, 소년들은 A 양의 시신을 이불에 싼 뒤 야산에 암매장한다. 이 과정에서 시신 위에 가방을 올려놓아 위장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후 공원 관리인에 의해 시신이 발견되고, 수사 끝에 주범 이 군과 공범 3명이 체포된다.
이들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A 양의 지적 장애로 인한 장애수당과 기초생활수급비 등 매달 100만원 이상의 정부 보조금을 빼앗아 자신들의 생활비와 유흥비로 탕진해 온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족 오원춘이 A양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A양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끊임없이 거짓말을 쏟아내 여론의 뭇매를 맞은
사건. 게다가 현재진행형이다. 쉽게 말하자면 2012년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최악의
살인사건 이자 흑역사.
워낙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2012년 4월 30일, 신촌역 근방의 창천근린공원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 창천근린공원
살인 사건이라고도 한다
2012년 4월 30일 월요일 오후 8시 20분경, 고등학생 이모군(16세)과 대학생 윤모군(18세)이 대학생 김모씨(20세)를 신촌역 인근의 창천근린공원으로 유인하여, 고등학생 홍모양(15세)이 망을 보는 사이에 칼과 쇠막대로 폭행하여 살해한 뒤, 시신을 4~5미터 떨어진 풀숲에 유기한 사건이다. 이후 지나가던 주민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김모씨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수사가 시작되었다.
인터넷 상에 떠돌던 정모 괴담+현피가 최악의 경우로 실체화된 사례이다.
1989년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 동안 서울과 강남 등 수도권 도심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칼로 마구 찔러 8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
살인자. 묻지마
살인과도 조금 비슷한 유형 같기도...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 묻혀 나름 튀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유명세가 적다.
심영구는 26살때 이미 강도상해죄로 전과1범이었으며, 검거 당시에는 30세였다. 강도로 형을 살았다 나왔음에도 정신 못차리고 돈을 벌려고 칼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목적은 돈이었지만 폭력을 휘두르다보니 도리어 폭력에 중독되서 점점 끔찍한 연쇄
살인자가 되어버렸다. 실제로도 "일단 한번 찌르고 나면 이성을 잃고 마구 찌르게 되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수차례 범행을 저지른 후 결국 1990년 1월 22일 검거되어, 1992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주로 심야에서 새벽 사이에 마구 공격해 살해하고 금품을 훔쳐간다는 기본적인 스타일이 김대두와 비슷하다.
2008년 3월 7일, 경기도 양주시에 살던 평범한 여중생 13살 강수현 양이 불법체류자 필리핀인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
사건이 있기 전, 범인은 형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에 가끔 들르며 여기에 살고 있는 강 양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어머니가 일 하러 나간 뒤엔 보호자가 없다는 걸 알고 범죄를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사건 당일, 범인은 형이 살고 있는 공동주택의 현관문을 두드렸는데 이때 문을 열러 나온 강 양을 본뒤 숙소로 돌아가 식칼을 챙기고 다시 형을 찾는 척, 현관문을 두드렸는데 다시 나온 강 양에게 식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해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집 밖 2~30m 부근에서 범인은 강 양을 눕히고 강간을 시도했는데 이때 범인의 팔이 느슨해지자 강 양은 이를 뿌리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범인은 달아나는 강 양을 뒤쫓아 등에 칼을 꽂았으며 강 양은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며 달아나다 목,배,가슴,등에 13번이나 칼에 찔린뒤 쓰러졌고 범인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강 양을 발로 마구 짓밟은뒤 유유히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쓰러진 강 양은 과다출혈로 결국 자기 집 근처에서 죽어갔다
경찰에 잡힌 범인은 처음에는 '한국말 할줄 모른다'로 일관하며 뻔뻔하게 선량한 외국인 행세를 하다가 '어린애가 나한테 욕을 해 화가 나서 찔러 죽였다' 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는데 경찰이 DNA 감식 결과, 혈흔, 수집한 증거물들을 늘어놓으며 추궁하자 자백했다. 계획된 범죄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범인은 우발적
살인이라고 우겼다.
범인은 2008년 4월 20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간에 범인이 형을 제대로 받지 않고 본국인 필리핀으로 추방됐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는데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범인 '빌리 가스 준 패럴'은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복역중.
미모의 20대 후반 여인이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남편과 가족들을 살해하거나 실명시키고[1] 방화까지 저지른 사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화제를 일으켰고(...) 표창원 교수가 진행하는 케이블 TV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다만 이때는 여죄가 파악되지 않아서 남편과 가족 실명부문만 다루었다.
엄여인은 보험 설계사로 일하면서 두번의 결혼을 했는데 남편 두명을 다 약을 먹여 죽이고 어머니와 오빠를 실명시키고 보험금을 타기위해 방화까지 저질렀다.
엄씨는 빼어난 미모에 여자다운 말투와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성격으로 도무지 주위에서 그녀의 범행을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시댁에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극진히 잘해 천사라고 불릴 정도. 그녀를 취조한 형사들조차도 예쁜 말씨와 용모에 넘어갈 뻔했다고 증언.
처음에는 마약에 중독되어 돈이 필요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으나 마약을 한 적이 없는것으로 드러나 결국 동기는 돈이었음이 밝혀졌다.
엄여인은 반사회성 성격장애 테스트에서 40점 만점에 40점을 맞았다.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현재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이라고 한다.
2002년 3월 6일, 이화여대 법학대학에 재학중이던 정혜경(가명)씨가 무참하게 살해된
사건. 당시에는 일반적인 묻지마
사건이나 원한에 의한
사건정도로 여겨졌으나 그 배후가 밝혀지면서 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온
사건이다.
2002년 3월 6일, 정혜경(당시 22세)씨가 새벽에 수영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 후 연락이 끊겼다. 가족은 평소 속을 썩이지않던 정씨가 돌아오지않자 후술할 가정사에 겹쳐서 큰 근심에 빠졌으며 정씨의 아버지가 수소문한 끝에 3일 후인 9일 딸이 납치되는 CCTV 영상을 확보해서 그전까진 단순 실종으로 수사할 의지가 없었던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진전되지 않던 수사는 등산객에 의해 16일 정씨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세상을 경악케할 서막을 올리게 된다.
정씨의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했는데, 머리와 안면에 6발의 총상을 입었으며 부검결과 한 쪽 팔의 경우 3군데나 골절상을 입어서 그녀가 죽음을 맞기 직전의 공포와 고통을 가늠케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때문에 초기에 수사 상황을 자세히 모르던 언론과 여론은 정씨가 묻지마살인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닌가 추정을 했으나 수사 상황은 달랐다. 정씨의 아버지는 당시 자신의 딸에게 문제가 되었던 사건과 수상하게 여기는 인물 등을 경찰에게 얘기했고 이것은 아주 구체적인 수사방향을 제공했다.
2003년 11월 첫 법정이 열렸으며 1심에선
살인 교사를 한 윤씨,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조카 윤씨와 김씨에게 20년이 선고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이들이 항소를 한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얻어맞았다. 윤씨의 조카는 이번엔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며 진술을 바꿔서 죄를 깎아보려 상고이유서를 제출했으나 대법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원심을 확정했다.
2004년 무기징역이 확정되자 회사와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겨주게된 윤씨는 남편인 회장에게 바로 이혼을 당했다. 그녀의 정신나간 범죄행각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의 뿌리가 과거 남편의 잦은 불륜행각으로 인해 생겼으나 정작 남편은 이혼을 하는 선에서 자신의 책임을 마무리했다.
사건의 또다른 핵심인 김판사는 이혼은 커녕 어떠한 대처없이 그대로 법원에 남아 계속 업무를 수행하였다. 법조계 내에서도 도의적 차원에서 그만둬야한다는 의견이 팽배했으나 아무 말 없이 버텼으며 적격심사를 통과한 이후인 2012년 2월 6일에 사의를 표명하며 판사를 그만두었다.
상류층의 모럴 해저드가 얼마나 만연해있는지를 대중에게 재확인해주는
사건이었으며, 결국엔 그들만의 분쟁에서 여러 소시민들이 희생당한 참극이었다.
1999년 10월 22일 함께 술을 마시던 조직원 이순철이 다른 동료를 폭행했다가 보복이 두려워 아예
살인을 결심, 그 조직원을 살해하고 사후처리를 같이한 동료들과 함께 시체에서 간을 꺼내 안주로 먹어버린
사건. 간을 먹은 이유는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였다고.
시체를 완전히 해체해버려 쓰레기 봉투 11개에 나눠담아 버렸기 때문에, 사망자의 신원 확인이 어려워 DNA감정까지 해야했다.
영웅파 6명은 같은해 10월 29일 검거되어,
살인 및 암매장의 핵심멤버 이순철, 박재범, 창종빈 셋은 무기징역을 받았고, 정덕수는 25년의 중형을 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들이 반인륜적이고 엽기적 범행을 저질러 같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만큼 중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막가파 일당이 체포된지 3년밖에 안 지났었기 때문에 워낙 사회적으로 더블로 충격이 컸었다. 묘하게도 막가파 일당 체포날짜랑 같은 날에 체포되었으며(10월 29일) 지존파, 막가파, 영웅파 이 세 조직은 3년 텀으로 체포되었다. (지존파 1993년, 막가파 1996년, 영웅파 1999년.)
대한민국 연쇄
살인범. 그가 남긴 명대사(?)로는 '내 나이만큼 사람들을 죽이겠다.'
전직 한국의 경찰관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희대의
살인마. 그가 저지른
살인 사건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통칭 우순경, 그가 저지른
사건을 우순경
사건이라고도 한다.
궁류지서로 전근온 뒤 2월부터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田)양과 사귀게 되었고 3월 초부터 전양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한다. 동거에 들어가기 전에 전양의 부모는 결혼한 뒤 함께 살라며 만류했지만 우범곤이 결혼비용이 없다며 가을에 식을 올리기로 하고 당장 혼인신고부터 하겠다고 고집했다. 가뜩이나 집안이 가난해 늘 열등의식에 젖어있던 우범곤은 식도 올리기 전에 여자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자신의 무능함에 심각한 컴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4월 26일, 우범곤은 그날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낮 12시경 집에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동거녀가 몸에 붙은 파리를 잡아주기 위해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자 이를 계기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오후 4시경 지서로 간 후 저녁 7시 반경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만취한 그는 주먹으로 코피가 날 정도로 동거녀를 폭행했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동거녀의 친척언니가 뛰어와 말리자 친척언니의 뺨마저 때리며 닥치는대로 두들겨 부수는 등 난폭하게 굴었다. 이때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어 동거녀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한 우범곤은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던 카빈 소총 2개, 실탄 180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밤 9시 40분 - 지서를 나온 우범곤은 마침 앞을 지나던 20대 남자에게 총을 쏜 것을 시작으로 면 토곡리 시장으로 달려가 총을 난사하여 장을 보러온 마을주민 3명을 살해했다.
밤 9시 45분 - 마을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 우체국으로 가서 교환원 2명과 숙직 중이던 집배원 1명을 살해.
밤 10시 - 압곡리 매실부락으로 가서 10여 분간 총기를 마구 난사, 주민 6명을 살해했다.
밤 10시 10분 -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가 주민 7명을 살해했다.
밤 10시 50분 - 상갓집에 난입하여 “비상이 걸렸다”고 말하고 문상객들과 어울려 10여 분간 술을 마신 뒤 갑자기 총을 난사, 12명을 살해하고 이후 불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이곳에서만 무려 23명을 살해했다.
다음날인 27일 새벽 5시 35분 - 평촌리 마을에 다시 나타나 한 민가에 침입,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갖고 있던 수류탄 2발을 한꺼번에 터뜨려 그 자리에서 우범곤을 포함해 4명이 폭사했다.
블로그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운영하던 유명 블로거 황덕하가 자신의 전처 최 모씨를 찔러 죽이고 모습을 감춘
사건.
2011년 7월 7일 오후 7시 30분쯤, 황씨는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 있는 자신의 부모 집에서 2년 전 이혼한 전 부인 최모 씨를 불러서 만났다. 황씨는 재결합을 요구했으나 최모 씨가 거절하자 말다툼이 벌어졌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미리 준비해 간 30cm 회칼을 꺼내 6차례 찔러 숨지게 하였다. 범행 직후 그는 부모님에게 "나도 죽겠다"란 말을 남기고 이후 종적을 감췄다.
황씨의 부모는 119에 신고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최씨는 경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다. 황씨의 부모는 끔찍했던
사건이 떠올라서 얼마동안 이 집을 떠나 있었다고 한다.
황씨는 범행 직후 나도 죽겠다고 말한 뒤에 차를 타고 도주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두 달간 행방이 묘연해진다. 황 씨는 범행을 저지른 당일 오전까지 포스팅을 남기기도 할 정도로 블로그에 심취해 있었으나 현재는 블로그 역시 중단한 상태이다. 단,
사건 다음날인 7월 8일에 트위터에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경찰은 칠보산 중턱에서 황씨의 차량을 찾았지만, 황씨 본인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수십명의 경찰이 며칠동안 칠보산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수사를 벌였지만 황씨의 소재는 파악하지 못했다. 은행 출금 기록이나 휴대전화 사용, 인터넷 접속 같은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수원남부 경찰서는 황씨를 지명수배하게 된다. 이에 키 178, 등산복 차림, 고시원 거주, 블로그 운영 등의 신상 정보가 언론에 알려졌다. 경찰에서는 황씨가 자살을 했을 가능성과 고시원에 은둔하고 있을 가능성을 모두 검토하고 있다. 또한 너무나 생활반응이 없다는 점에서 은둔하고 있다면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러다 약 2달이 지난 2011년 9월 13일, 집 인근 야산에서 황씨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아마도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유영철(1970년 -)은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참고로 연쇄
살인 이전에는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왔다. 걸어다니는 교도소다.
유영철의 엽기적범죄로 인해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졌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이코패스 판정 테스트인 PCL-R 검사에서 40점 만점에 34점을 맞았다고 한다. 엄여인보다 점수가 낮다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부부를 살해했다. 이 사건 이후 2004년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우리나라에 연쇄
살인으로 언론을 탄 최초의 연쇄
살인자. 이관규 이전에 있었던 이판능은 대량
살인이었으니 좀 다르다. 대한민국 수립후 최초의 연쇄
살인자인 김대두보다 50년은 앞선다. 물론 이관규와 김대두 사이에도 연쇄
살인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이관규나 김대두만큼 이름을 알린 경우는 없다고 보면된다.
1929년 여름 한 달 간격으로 11살과 9살의 남자 어린이 2명을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 남자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추행 전과가 있던 이관규가 범행 이후 종적을 감추자 지명수배하였다.
범행당시 39살이었던 이관규는 이미 결혼하여 아이가 다섯명이나 있었음에도 여자를 혐오하며 남자 어린이를 탐하였다. 그리고 원래 성격도 문제가 있어서 사소한 트러블에도 도끼를 휘두르는 미친놈이었다.
전국을 도망다니던 이관규는
사건발생 1년 6개월만에 자신의 집에서 검거되었다.
그러나 1932년 12월 7일자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이관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그 이후의 자료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관규는 사이코패스에 페도필리아적 성향을 가진 살인마라고 규정할수 있을듯 하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에서는 남자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다는것을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무죄판결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1980년 11월 13일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이윤상이 유괴되어, 다음날 살해된
사건(범인이 체포되기 전까지는 이윤상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따라서 실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사건으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81년 11월 30일에 범인이 체포되었다. 범인은 이윤상의 학교 체육선생인 주영형이었으며, 그와 불륜관계에 있던 여고생 두 명이 종범(從犯)이었다. 따라서 '주영형
사건' 혹은 '주교사
사건'으로도 불린다. 범인의 신분 때문에, 그리고 범인과 종범인 여고생들이 사제간에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
당시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살던 이윤상은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다. 그는 1980년 11월 13일 오후 4시경, 학교 체육교사인 주영형과 상담을 하러 간다고 말한 뒤 외출한 뒤 유괴되었다. 그리고 그 날 밤 8시~12시 사이에 범인으로부터 4차례의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 걸려온 전화는 남자 목소리였는데, "전과자들인데 밀항자금 4천만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인 11월 14일, 이윤상의 부친이 경찰에 유괴사실을 신고하였다. 경찰은 신고 접수 직후, 이윤상의 집 전화에 녹음장치를 부착하고 형사 2명을 잠복, 전화를 감청케 하였다.
16일 오후 6:40경, 범인들이 이윤상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범인들은 4천만원을 요구했고, 2천만원을 준비한 뒤 이윤상의 누나가 약속장소로 나갔으나 범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범인들은 4월 6일까지 6차례의 협박편지와 62회의 협박전화를 했다. 첫번째를 제외하고는 협박전화는 모두 여자 목소리였으며, 편지의 필적은 1,2,5번째 편지는 또박또박 쓴 여자 필적이었으나 3,4번째는 거친 남자의 필적임으로 볼 때 경찰에서는 여자가 낀 3,4인조의 계획적 범행으로 추정했다.
범인들은 5번째 편지(2월 2일)에서 이윤상이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아직 살아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당초 경찰은 이윤상을
사건 당일 불러낸 주영형에게 혐의를 두었으나, 학교 선생님인데다가 주가 사전에 치밀한 범행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경찰은 주가 제시한 알리바이를 믿게 되었다. 영구미제로 끝나는 듯했던
사건은 1981년 11월, 주영형이 여중 재직 시절 교외지도를 빌미삼아 여학생 20여 명을 성폭행한 사실을 경찰이 밝혀내면서 수사가 활기를 띄었다. 또한
사건 당일, 이윤상이 "선생님이 어머니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모친의 진술이 실마리가 되었다. 한편 주영형을 거짓말 탐지기로 조사한 결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마침내 11월 29일, 경찰은 주영형의 자백을 받아냈다.
범행동기는 주가 도박으로 빚 1천만원을 지고 빚 독촉을 받게 되자, 비교적 가정이 유복한 이윤상을 유괴하여 금품을 뜯어내려 했던 것인데, 이 과정에서 주는 자신과 여중 재직 시절부터 불륜관계에 있었던 여고생 A양과 B양을 가담시켰다. 처음에는 이윤상의 누나를 유괴하기 위해서 A양을 통해 접근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대신 이윤상을 유괴한 것이었다.
진술한 바에 따르면, 주는 유괴 다음날인 11월 14일 오후 6시경, 범행 아지트인 영등포구의 모 아파트에서 이윤상이 "누나를 유괴하려 한 것도 선생님이에요"하며 고함치자 명주실 노끈으로 손발을 결박하고 반창고로 입을 틀어막은 뒤 이불을 뒤집어씌웠다. 그리고 곧바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가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이윤상은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주는 A양의 협조를 얻어 시체를 11월 30일경 북한강변에 암매장했다.
A양은 유인과 감금, 살해에는 가담하지 않고, 주의 요구에 따라 협박전화와 금품요구, 시체유기에 협조하였으며, B양은 협박편지 작성에 가담하였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주는 "경찰의 수사가 너무 괴로워 자살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써 수사에 혼선을 주고, 아울러 범행에 가담한 A양에게도 동반자살을 가장, 먼저 자살하라고 꼬드겨 증거를 없애려 시도한 것으로도 드러났다. A양은 수면제 4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결국 범인 주영형은 1982년 11월,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공범 A양에게는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형이 선고되었다. 한편 B양은 1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83년 7월 9일, 주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주는 사형 집행 전 기독교에 귀의했는데,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자신의 눈과 콩팥을 사회에 기증한다고 말했다. 주의 장기는 대학생 등 4명에게 기증되었다.
한편 A양은 1985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고, B양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000년 친부모를 토막살해한 범죄자. 1994년에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인 박한상과 세트로 묶어서 패륜아의 대명사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아래 설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박한상과는 그 배경이 전혀 다르다.
해군사관학교 장교출신인 아버지와 명문 여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인 어머니, 즉 전형적인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모범적인 학생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부모를 비롯한 이은석의 가정은 그리 화목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이자 원리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군대식 교육을 시켰으며, 자신은 가족들에게 무관심하면서도 가족들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완벽주의자이자 히스테릭 증상이 심해 특히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시켰다. 부부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아 각방을 쓰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은석은 초등학교 시절 친구집에 놀러가서 친구 부모가 한 방을 쓰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부부는 원래 각방을 쓰는 것인줄 알았다고 한다) 부부싸움이라도 했다 하면 한 달 이상 대화 한마디도 없는 일이 예사였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부부 싸움의 여파가 단 며칠만 간다고 해도 집안의 그 쌩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운데 한 달 이상이라면 어땠을지 상상 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부모 양쪽 모두 아들, 특히 이은석만 보면 항상 불만을 표시했고 말도 안 되는 잔소리를 자주 퍼부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청난 신체적, 정신적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 밥을 늦게 먹는다고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만화를 그린다고 머리카락을 잡아뜯는 식의 폭력이었다. 이씨의 부모는 늘 남들과 비교했고 성적,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광적인 히스테리와 폭력을 행사했다. 뭔가 못하면 당연히 혼나고, 잘 해도 왜 더 잘 하지 못하냐며 혼이 났다. 이은석이 어릴 때는 만약을 대비해 야구 방망이까지 숨겨 놓았다고 할 정도로 부모, 특히 어머니는 그를 매번 심하게 질책하고 모욕을 주기만 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씨는 내성적으로 변해가고 대인 기피증이 생기게 되었으며 학창 시절에는 이러한 성격에 작은 키 때문에 놀림까지 받으며 속칭 왕따가 되었다. 군입대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부모는 이은석의 고통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버지는 군인이라는 직업상 한 달에 한번 집에 들어오면서 아들을 본체만체했고, 그런 아버지를 기피하면 "사내놈이 왜 그러냐", "굼벵이 같은 자식"이라고 쏘아붙였다. 이씨가 군대에 가 있는 3년동안 부모는 면회를 단 한 번도 가지 않았으며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도 인격적 모욕과 멸시는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이은석은 부모로부터 "네가 뭘 잘 하냐? 공부나 해라, 공부도 못하면 사회에서 낙오한다", "너 같은 놈은 사회생활 못한다", "너 같은 자식 필요없다"는 식의 상처 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이은석에게는 형이 한 명 있었는데, 이 형은 이은석과는 달리 꽤 과격하고 불같은 성격이라 부모의 막장 행동에 염증을 느끼고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집을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이에 당황이라도 했는지 형에게 화해를 청하며 독신자 아파트를 마련해 주고 나름대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파트를 마련할 돈을 이은석의 명의로 대출받을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은석은 형의 아파트 이사를 도와주고 온 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또 혼나게 된다. 이 때가 살해를 저지르기 열흘 전이었는데 이 날 그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반항했다.
사건 일주일 전, 어머니로부터 그 사실을 모두 전해들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야단치기 시작하자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이야기들을 울면서 모두 쏟아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그런 건 그때그때 이야기해야지 왜 이제와서 꺼내느냐, 사내놈이 한심하게도 이 모양이니"이라는 멸시와 모욕 뿐이었다.
이 마지막 대화에서 단절을 느낀 이후에는 6일동안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식사 등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부모가 그런 이은석을 보고도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6일간 방에서 혼자 지내면서 그는 부모와 잘 지내기는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동안 쌓인 분노가 폭발하면서
살인을 결심했다.
사건 당일 새벽, 양주를 연거푸 마신 후 어머니부터 망치로 때려 살해하고, 약 4시간 후 아버지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했다. 가장 미워했던 어머니를 먼저 살해했고, 아버지는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것 같지만 나중에 이 광경을 본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결국 아버지도 살해한다. 둘을 한번에 죽이지 않고 4시간의 시간차를 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이틀에 걸쳐 시신을 토막내 여러 곳에 유기하고 청소 및 뒷처리를 했다.
이씨는 사건 직후 경찰서 진술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라며 울먹였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은석의 형이 했던 말인데, 부모를 죽인 동생을 원망하기는 커녕 "그럴 수도 있다. 나는 동생을 이해한다."는 말을 하면서 공범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기도 했다. 결국 공범은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부모를 죽인 동생을 두둔하고 나선 것을 보면 같은 집에 살아오면서 동생이 당해오던 폭력을 보며 자신도 느낀게 많았던 모양이다.
1997년 전남대학교 학생인 이종권(당시 25세)이 학우들에게 경찰측 프락치로 오인받아 집단 린치, 살해되었던 충격적인
사건. 당시 운동권에 자성을 촉구하는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학생운동의 병크 중 하나.
린치를 주도한 학생들은 한총련의 지부인 남총련 소속 학생으로, 피해자를 남총련 사무실 방으로 끌고가 잔인하게 구타, 살해했으며 구타에는 주먹은 물론, 쇠파이프와 물병까지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직접적인 사인은 구타 도중 강제로 먹인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사한 것으로 판명.
놀랍게도 당시
사건에 대해 주모자들은 술 취한 주정뱅이가 캠퍼스에 쓰러진 것을 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조치를 했다는 등의 위장 발언을 한 것으로 탄로나 더 큰 공분을 샀으며, 이 일로 당해 6월 19일에 전남대 총장 노성만이 교수진을 대표해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또한 개교 45주년으로 예정된 행사 역시 전면 취소되었다고.
여러모로 한국 학생운동계의 흑역사라 할 만한 사건.
일제강점기 당시의 조선인 연쇄
살인범. 엄밀히 말하면 연쇄
살인보다는 대량
살인이다.
이판능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전동차 차장으로 근근히 먹고 살던 하층 노동자였다. 어느날 집에 있던 수건이 없어져서,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으니 무시당하자 분노가 쌓였으며, 집에 돌아왔는데 일본인인 하숙집 여주인이 시비를 걸자 분노가 폭발. 부엌칼을 휘둘러 주인집 가족을 죽이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찔렀다. 그 결과 17명을 살해하였다.(희생자 중에는 일본인 만이 아니라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징역 7년 6개월로 감형받았다. 감형받은 이유는 정신이상인데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당시 일본에서는 최초로 정신병을 감형 사유로 내세웠다고 한다.
조선인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져 방청석이 미어터질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들의 차별적인 태도에 많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판능의 범행 동기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하며, 상당히 동정적인 분위기라 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재판부는 러시아 황태자를
살인미수해서 일본 멸망의 위기를 일으키고 전 일본인이 러시아에게 필사적으로 사죄와 배상을 하도록 만든 범인에게도 "법조문에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판결하지 않았을 정도로 꼿꼿한 곳이니, 당시 일본에서는 소수의 하류 계층에 불과한 조선인들의 압력에 뭔가 판결이 영향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근대형 대량
살인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뒤로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제2의 이판능'이라던가, '제3의 이판능'이라고도 일컫었다.
이판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1955년에 사망했다는 기록만이 있을뿐이다.
2008년, 해태 타이거즈 야구선수 출신의 사업가 이호성이 내연녀와 내연녀의 세 딸, 총 4명을 죽이고 자살 한 사건
워낙 유명한 사건이니 설명 생략.
정남규는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연쇄
살인자이다.
우범곤, 유영철, 김대두에 이어 한국에서 4번째로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
살인자이다. 유영철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으로서, 단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후,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그 후 보강 조사에 의하여 범행의 대부분이 밝혀졌다. 흉악성으로는 KCSI 요원 사이에서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었다.
유영철이 좋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기인한 가진자에 대한 분노나 이혼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혐오감에 의해 범행을 저지른 반면, 정남규의 경우 철저히 쾌락을 위한 전형적인 쾌락
살인범이라는 점이 다르다. 유영철은 주로 둔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별다른 성적인 행위를 하지 않은 반면, 정남규는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성폭행과 방화를 함께 저질렀는데, 이러한 "찌르는" 행위, 성폭행, 방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성적인 동기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지 못해 우울하고 답답하다. 빨리 죽여 달라."는 발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쾌락
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범행을 자백할 당시,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엔 CCTV가 너무 많아서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살인을 더 쉽게 하기 위하여 주로 방범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서민층 및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범행 대상으로 잡았으며, 침입 방법도 문을 따거나 창문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을 대상으로 범행하였다. 이는
살인 자체를 쾌락으로 여겨서, 좀더 쉽게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장소를 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런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준비하는데 있어 상상 이상의 힘을 쏟았다.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지하철 몇 정거장 정도의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였는데 이를 위해 평소 마라톤 등의 달리기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자신의 방에 있을때는 건강정보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며 자신의 식단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등 '살인을 쉽게 하기 위해' 훈련등의 장기적 계획까지 짰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범죄를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하며 수사상황을 학습하고 있었다.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는 수사진의 얼굴을 찍은 월간지 스크랩까지 발견되어 수사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고 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
체포 후 왜 그런짓을 저질렀냐는 질문에 정두영이 답한말.
정두영(1968년 12월 ~ )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9명의 인명을 해친 연쇄
살인자다. 한국 최초로 연쇄
살인범으로 검거된 범인이다.
유영철이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던 바로 그
살인마. 정두영도 사용 흉기로 둔기를 사용했고 유영철이 이를 본받아 자신도 둔기를 사용했다.
이미 18세 때 첫
살인을 저질러 11년 복역하고 출소직후 절도로 짧게 6개월 복역한뒤 1999년 3월 출소후 본격적으로 강도
살인을 저질러 댔다. 당시 이미 전과 8범이었다. 주 영역은 부산, 울산, 경남지역.
어린 시절 2번이나 어머니에게서 버림받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데 대한 강박적 열망이 있었다. 평범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절도로 차곡차곡 모아놔 검거 당시 통장에 1억 3천만원이 있았다. 최종 목표액은 10억을 버는거였고 10억을 벌면 결혼도 하고 PC방 차리고 아파트를 마련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평범하고 소박한 꿈을 가장 최악의 방법을 동원해 이루려한 케이스. 뭐 이미 연쇄
살인을 저지른 시점에서 평범한 가정은 영영 무리였겠지만
MBC 히스토리 후에서 방영되기도 하였다. 희한하게도 사건 당시와 검거, 판결시에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한 케이스.
2012년 7월 12일 오전 8시 경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에서 올레길을 걷던 강 모(40)씨가 게스트하우스(숙소)에서 나선 후 그대로 실종되어 피살된
사건.
2003년 12월 19일 오후 4시경, 범인 이진우(24·무직)는 서울특별시 동작대교에서 남쪽으로 검은색 트라제 승용차를 몰고 가다 다리 중간 지점에서 내려 자신의 아들(6)과 딸(5)을 다리 아래로 한강으로 내던지고 달아났다.
목격자 중에는 소설 '배후'의 작가 서현우 씨가 있었다. 그는 19일 오전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에서 KAL 858기 진상규명 기자회견을 가진 뒤, 심재환 변호사의 사무실로 이동중이었다. 그는 이 때 다리 한 가운데서 트라제XG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서씨는 이 때 범인이 차에서 나와 커다란 물체를 강으로 휙 던지는 것을 목격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한 서씨는 차를 급히 세웠고 범인에게 다가갔으나 이씨는 급히 차를 타고 도주했다. 서씨는 “아이를 던진 것을 확신하고, 도망치는 이씨의 차량 번호를 급히 적어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다른 목격자 박영창씨(36,전기공)는 “처음 아이를 던질 때는 사람인지 확신이 안섰으나 두번째는 아이임을 확신했다”며 “아이가 축 처져 있지 않아 살아있는 상태로 보였으나 던지는 순간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22일 오전 11시 동작대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현장검증 영상 내용 중.
기자 : 지금 심정이 어때요?
범인 : 착찹하고 괴롭습니다.
(중략)
기자 : 왜 그랬어요?
범인 : 살 방법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기자 : 왜 같이 안 죽었어요?
범인 :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습니다.
기자 : 기독교인은 사람 죽여도 괜찮아요?
범인 : 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1982년 12월, 한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1982년 12월 14일 서울 금천구 (당시 서울 구로구) 호암산에서 24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조사결과 사망자는 이발소 여종업원 김모씨로 밝혀진다. 발견 당시의 상태가, 일단은 독살로 추정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저항한 흔적이 전혀 없고, 시신이 옷을 벗고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럼 이 김씨는 굳이 산까지 올라가서 굳이 옷을 벗은 뒤 독약을 먹고 바닥에서 몸부림치다 죽었다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 이유로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프로파일링 기법이 동원되었으며 곧 범인이 잡혔다.
이
사건의 범인은 전과4범으로, 복역 후 보일러공으로 살던 이동식(당시 42세)으로 출소후에 사진에 취미를 붙여 이것저것 사진을 찍으며 살았다고 한다. 의외로 사진에 재능이 있어서 한국사진작가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전시회까지 열었을 정도였다.
그는 예전부터 죽음을 사진에 담고 싶어했다. 죽음을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었고, 후처를 모델로 네크로필리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다. 그러나 연출된 죽음만으로는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 날 자신이 다니던 이발소의 면도사 겸 부업을 하는 김모씨에게 출세를 시켜주겠다며 누드 사진을 찍자고 한다. 김모씨가 수락하자 함께 산에 올라갔고, 옷을 벗기 전 김씨에게 추울테니 감기약을 주겠다면서 약을 건네준다. 그 약은 청산가리였다. 이씨는 독약을 먹은 김씨가 땅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21장이나 사진으로 찍었다. 죽어가면서도 옷을 벗기면서 계속 사진을 찍었으며 죽은 후에도 계속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검거 후 재판을 거쳐 범인 이동식은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至尊派. 1993년 조직된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연쇄 살인 조직.
일반적으로 연쇄
살인자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으며, 두 명 이상이 개입된다고 해도 서로 부부나 연인, 혈연인 경우가 많은 것과 비해 약간의 인연만 있던 타인들이 오직 '연쇄
살인을 위한 대규모 집단을 조직'한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
1993년 4월 김기환이 학교 후배 강동은과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을 포섭하여 결성한 조직이며, 원래 이름은 지존파가 아니라 '야망'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인 마스칸. 지존파라는 이름은 경찰이 외우고 발음하기 어려워서 이들을 검거한 고병천 경정이 지어준 이름이다. 조직원은 김기환, 김현양, 강동은,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등이다.
이들은 막노동(노가다)으로 돈을 모은 다음, 전라남도의 한적한 농촌에 농장을 구입하여 아지트로 삼았다. 지하실에는 철창이 달린 감옥과 화장을 하기 위한 아궁이도 만들어놓았다.
조직을 결성한 그 해부터 이듬해 9월 15일까지 연쇄살인을 벌이고 1994년 9월 21일 체포되었을 때까지 반성이 없었으며, 살인의 이유를 불평등한 사회 모순이라며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가치 전도현상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들은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위하여 김민경으로부터 백화점 고액거래자 명단을 구입하였는데, 개인정보 유출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악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주로 백화점에서 벤츠 등을 타고 나오는 복부인 등을 대상으로 하여 범행을 하려고 했으며 피해자들의 현금만 빼앗고(당시에는 카드보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녔다) 협박이나 어떠한 협상 없이 그 자리에서 토막살인하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어처구니 없는 점은 그들이 살해한 사람들이 전혀 그런것과 관련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살해당한 중소기업 사장부부는 방탕한 상류층이 아니라 공고를 나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빚내어 새로 공장 인수한 건실한 사업가였으며 빚을 막고자 어음 돌려막기를 위해서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녔고 고급차처럼 보이던 차도 회사용으로 개조한 중고차임이 밝혀졌다. 게다가 어려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시기에 납치, 살해당해서 회사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게다가 어린 자녀들도 있는 상태에서 참변을 당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살해한 사람은 부유층과는 거리가 먼 밤무대 악사였다.
체포 경위는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술집 종업원 일을 하는 20대 모 여인도 그들의 범행 대상이 되었으나, 그녀도 업무상 무리하게 명품 가방과 벤츠를 끌고 다닐 뿐 실제로 매우 불우한 환경이라고 읍소하여 조직원들의 동정을 샀다고 한다. 결국 조직원은 그 여인을 한 패로 끌어넣기로 결정, 여인에게 다른 피해자를 직접 살해할 것을 지시하였다. 여인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녀는 결국 조직원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혼자 있는 틈을 타 당
사건을 경찰에 제보하게 되어 덜미를 잡히게 된다.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 조직의 방법상 그녀의 제보가 있을 때까지
사건 자체가 드러나질 않은 상황이었다.
초상권 개념이 부족했던터라 범인 체포후 얼굴이 그대로 나왔고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야타족을 죽이겠다거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말한것이 화제가 되서 부유층은 반성하라는 자성의 움직임이 일시적으로 나기도 했다. 또 강령에 '그랜저급 이상'을 지정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그랜저 판매량이 일시 감소했다. 언론플레이와 광적인 취재열기가 잘못 퍼진 좋은 예
이들은 중국에 가서 훈련하려고 했었고 야인이나 뺑끼통과 같은 책을 교재로 삼았다고 자랑했다.
살해한 사람들의 시체는 지하의 사설 화장장에서 태웠고 일부는 태우면서 먹었으며 주변에 냄새가 나는걸 방지하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같이 구우면서 먹었다고 한다.
이들은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11월 2일 조직원 6명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단, 제보자였던 여성은 제외되었다. 검찰 측에서는 결정적 제보자인 여인이 처했던 상황을 불가항력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하여, 기소조차 하지 않고 지방으로 피신시켜 집과 직업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영화 추격자 초반부의 모티브 사건이 되었고, 영화 무법자에 나오는 범죄조직도 지존파를 일정부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2월-12월에 걸쳐서 천안 일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총 9명이 살해되었다. 범인들의 죄는 강도
살인 7건을 비롯해 인질강도 1건, 강도상해 2건, 강도미수 1건, 특수절도 1건 등 무려 18건에 달하여 살해된 사람들 이외에도 피해자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초에는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마지막
사건인 아산 H 대 경리부장 김모(53)등 2명을 살해한 혐의로 공범 라모(43)과 함께 1심에서 각각 사형,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김모(43)의 자백으로 인하여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범인 김모는 기소된
살인사건 외에도 7명을 더 살해한 것과,친형과 친구가 추가로 범행에 가담한 것을 자백하였다.이후 천안서 강력3팀 형사들은 이 같은 추가범행 12건에 대한 진술과 관련 증거자료를 확보한 뒤 김모의 친형 등 나머지 공범 2명에 대한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이들 공범들은 주거지 주변에서 잠복해 있던 형사들에게 체포됐으며 그후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중학교 동창인 김 모(상해치사 등 전과 5범)와 라 모(폭력 등 전과 5범)는 어느 날 2004년 9월 우연히 재회하게 된다.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막하게 생활하고 있던 김모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자신의 처지를 털어 놓는다. 그러자 친구의 얘기를 듣던 라 모는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나랑 같이 돌을 납품하는 업체에서 일을 해보자"고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잠시 함께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뒤 회사의 경영악화로 인해 월급조차 받지 못하게 되자 결국 이들은 직장을 그만두었다.결국 이들이 눈을 돌린 것이 범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거듭되는 범행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벌지 못하자 결국 그해 4월부터 김 모는 자신의 친형(56)을 범행에 끌어들인다. 김 모의 형 역시 사업실패와 이혼을 겪은 김 모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김 모의 형은 한때 가정을 이뤄 두 명의 딸을 두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큰딸은 입양 보내고 둘째딸이 네 살 되던 때 이혼을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다 할 수입도 없던 처지였던 김 모의 형은 '우리도 한번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는 동생의 제안을 이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번엔 라 모가 공사장에서 알게 된 이 모(53)를 공범으로 끌어들였다.
2007년 2월 25일 25일 오전 7시 10분 쯤 충남 천안시 성거읍 천안구치소 내 수감실에서 주범 김모(43)가 침낭에서 뜯어낸 자크 줄을 이용해 자살을 기도한 것을 순찰중이던 교도관이 발견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발견 당시 김 모의 수감실에서는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법원에서 자살한 김모(43)을 제외한 남은 3명에 대한 여죄를 모두 인정하여 공범 라모와 김모에게 무기징역, 이모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1983년 4월 26일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사건.
발단은 서울 중구의 을지병원에서 37세의 염모씨가 누군가가 염모씨의 아들에게 전해준 우유를 마시고 사망한 것에서 시작된다.
25일 염모씨의 아들은 병원 중환자실 앞 복도에서 놀고 있었는데 20대 여성이 다가와 우유가 든 비닐봉지를 전해주며 아버지에게 갖다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우유를 들고 병실에 왔고, 그러다 26일 새벽에 목이 마르다고 부인에게 말하자 부인이 그 우유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 우유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그것을 마시고 사망했다. 당시 그는 을지병원에 교통사고로 입원한 것이었으며 곧 퇴원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경찰은 그의 아들의 진술에 따라 수배를 하였다.
당시 병원안에서는 농약이 든 야쿠르트와 우유 등으로 여러 차례 독살미수
사건이 일어났고, 20대의 여성이 환자의 누이에게 전화를 걸어 환자들과 야쿠르트를 나눠먹으라고 말하거나, 화장실 물통 위에 '사람을 희생시켜 미안하다. 이 병원에 입원한 게 죄다.
이십 명을 희생시킬 테니 빨리 퇴원하라.'라는 쪽지가 발견되는 등 잇따른 독살위협으로 병원은 상당히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러나...
진범은 놀랍게도 염모씨의 부인인 김모씨였다. 염모씨의 아들이 진술한 여성의 인상착의는 김모씨가 사전에 아들에게 사전에 암기시킨 가짜 인상착의였으며 병원 안에서 잇따라 발견된 농약이 들어간 야쿠르트와 살해 협박 쪽지도 김모씨가 이 일이 연쇄범행처럼 보이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병원에 남겨진 쪽지도 그녀가 쓴 것이었고 자신의 소행임을 감추기 위해 왼손으로 쓰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해왔다.
범행동기는 보험금을 노린 것이었다. 당시 염모씨 일가는 사업의 부진과 염모씨의 교통사고로 4천 5백만 원의 빚을 진 상황이었고 친정집까지 재산을 압류당할 위기에 처하는 등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남편 염모씨가 생명보험을 타 빚을 갚자면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부인 김모씨는 범행 사흘 만인 28일 체포되었고 1984년 징역 15년이 확정되었다.
2009년 6월 4일 광주에서 발생한 인면수심의
살인사건.
48세 이모씨가 음주운전을 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11세)을 차로 치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걸 깨달은 이씨는 초등학생을 차에 싣고 시체유기를 위해 전남 담양군의 저수지로 가던 중에 아이가 아직 살아있다는걸 발견, 차에 있던
공기총을 6발 쏘아서 살해한뒤, 방향을 바꿔 나면 만월리 야산 계곡에 시체를 유기했다.
이씨는 이미 음주운전으로 면허 취소된 상태라 범행 당시에는 무면허 + 음주운전 상태였다. 대놓고 음주운전 상습범.
피해자는 사고 당일 태권도 학원에 간다며 집을 나간뒤 그대로 소식이 끊겨 부모는 실종신고를 하였다.
사건이 어떻게 발각됐냐면, 이씨가 술자리에서 어린이를 산에 버렸다며 떠드는 것을 익명의 제보자가 제보하여 경찰이 조사에 들어간것이다. 음주운전으로 시작해서 술자리로 끝나는 범죄행각.
이씨는 운전면허에 대한 집착으로 이와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2005년 3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최소됐으며 2007년 9월에 무면허 운전이 적발돼 2년간 면허시험 응시가 금지되었다. 2009년 9월이면 다시 면허를 딸 수 있었는데 6월에 음주운전 및 교통사고를 일으켰으니 면허 재취득이 어려워질 것이란 생각에 저질렀던것.
사실 이씨는 아이를 치고 병원에 데려갔었다. 종합병원 응급실에 데려갔다가 MRI를 하려면 더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의료진의 말을 듣고 병원으로 나온 다음, 이후 이런 죄를 저질른것.
이씨는 처음에는 아이가 중상으로 의식을 잃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으나 CCTV, 병원기록 등에서 아이가 걸어다닐수 있을정도로 경상인게 밝혀졌다. 이씨가 음주 상태였다고는하나 정상 기준에서 한참 떨어진 상당히 참혹하고 엽기적인 행위였던것이였다.
이후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62년 7월 8일, 한국에서 일어난 군부대
살인사건.
사건의 당사자인 최영오 일병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천문기상학과 4학년 재학중에 군에 단기 학보병 신분으로 입대한 상황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날 오전 8시에 시작되었는데 최일병의 선임 두명이 최일병의 애인이 보낸 편지 12통을 자기들이 마음대로 뜯어보는 일이 일어났다. 놀란 최일병이 선임병들에게 사과를 요구하자 선임병들은 되려 건방지다며 최일병을 구타했고 격분한 최일병은 두 선임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말았다.
최일병이 최고 명문대인 서울대 학생이라는 점때문에 이
사건은 세간에 널리 회자되었다. 상사 살해로 군법회의에 기소된 최일병은 사형판결을 받았고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대법원도 사형판결을 확정지었다. 최일병의 동문들은 물론 서울대 학생들과 각계 각층에서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탄원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지 불과 몇년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군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기에 이런 탄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최일병의 사형여부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달려있었다고 볼수 있는데 끝내 박정희 의장은 탄원들을 거부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지광같은 인물은 박정희 의장이 최후 순간에 사형을 면하게 한것으로 미루어보면 형평이 너무 안맞는게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군의 기강이라는 명분으로 끝내 사형을 확정한게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라는게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였고 이전 글에도 쓰여 있었으나 약간 불합리한 추측일뿐이다. 엄연히
살인을 벌였던게 이유라면 이유.
사실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당시의 수많은 상급장교가 살해되었던 경험으로 대한민국 육군은 특히 상관에 대한 프래깅
살인은 중범죄로 다스리고 있다. 실지로 1959년에 군사용어 다툼으로 자신을 구타한 준장(...)을 사살한 중령의 경우, 둘이 평소 친했던 사이였다거나 장래가 촉망 받는 사람이었고 군 내부에서 구명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역시 사형되었던 전례를 보면 최일병의 경우도 구명했을 경우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일병은 결국 1963년 3월 19일에 급하게 처형되었다. 심지어 처형 3시간전에 최일병의 형인 최영수씨가 최일병을 면회했는데 "다음 면회때는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와달라"라고 부탁했다고 하는걸로 보면 최일병 자신도 3시간 뒤에 처형되는건 몰랐던걸로 보인다.
최일병은 죽기직전에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라고 말했고 최후 진술로 "내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뿐입니다"라고 한뒤에 총살로 생을 마감했다.
더 끔찍한 것은 사형이 확정되자 최일병의 모친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포종점 근처의 한강둑에 올라가 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1965년에 유현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엄앵란,김승호,독고성등이 출연한 영화 "푸른 별아래 잠들게 하라"가 개봉했는데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멜로 사회물이었다. 물론 주인공 보정을 넘은 왜곡 작품.
2012년 7월 16일 오전 7시 30분 경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중촌마을에서 등교를 하던 초등학교 4학년 한아름(10)양이 실종되었다. 한 양이 그 날 밤 10시까지 들어오지 않자 한 양의 부모는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 그러나 결국 한 양은 7월 22일 오전 11시경 집에서 10여㎞ 떨어진 인평동 한 야산에서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7월 18일 오후 한 양의 집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도로변 하수구를 수색하다 한 양의 휴대폰을 찾아냈다. 분석 결과 한 양의 휴대전화는 실종 당일인 16일 오전 7시56분쯤 꺼진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한 양이 집에서 200여m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CCTV 확인을 했으나, 한 양은 그 시간에 버스를 타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경찰은 7월 19일 오전부터 실종아동경보를 발령하고 공개수사에 나섰다.
경찰은 주변 인물들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시도했다. 조사하던 중에 7월 20일 한 양의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고물수집업을 하는 김점덕(44)이 2005년 무렵 성폭행을 시도하다 폭행죄로 실형을 산 적이 있는데다 갑자기 잠적을 하자 그를 주목했다.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수배되어 경찰은 추적했고 7월 22일 오전 9시 40분 경 통영스포츠파크 근처에서 불심순찰 중이던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조사 결과 그는 '한 양이 차에 태워달라고 해서 태우고 가다가' 성폭행을 시도해서 한 양이 반항하자 목 졸라 살해한 다음 야산에 암매장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실 이전에 TV에 나온 적이 있는데 7월 19일 무렵 실종
사건을 취재하러 간 MBC 기자에게 한 양을 버스 정류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했고 자신은 그 후 밭에 일하러 갔다고 인터뷰했던 목격자였다. 덕분에 얼굴과 이름이 인터넷에 대대적으로 올라왔다. 평소에 잘 알던 사이였고 가까운데 살았으며 자기가 죽인 아이를 목격했다고 목격자로 인터뷰에 아무 죄책감없이 나온 점은 인면수심,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실종 당일에 이미 한 양을 살해했는데 뻔뻔하게 인터뷰에 목격자로 나온 것이다.
해당자료 30초 쯤에 범인이 나온다.
1996년 6월 3일 파나마 선적 참치잡이 원양어선 페스카마15호에서 벌어진 조선족의 집단
살인사건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이
사건이 국내에 알려지자,이 페스카마 호가 한국으로 입항할 때까지,뉴스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1996년 6월 3일 부산을 출발, 괌을 경유해 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페스카모 15호"라는 원양 참치어선에서 가혹한 작업 조건을 견디지 못한 조선족 선원들이 작업을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선장 최모씨는 근처 어선에 "사모아로 회항하겠다"고 교신했으며 회사 측에서는 대체 선원 8명을 준비시켜 놨지만 약속된 일정인 8월 13일이 되도록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유는 돌아가던 도중에 조선족 선원 6명이 선상 반란(8월 3일 저녁으로 추정)을 일으켜서 한국인 선원 7명(선장 포함)을 포함한 선원 11명을 무참히 살해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인 1등 항해사 1명만 살려두고 일본으로 향하려 했으나, 결국 그 1등 항해사에게 전부 제압되고,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피고인들은 전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고, 선박은 파나마 선적이었으며, 피해자들은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인도네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법원에 재판권이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검찰은 보호주의를 적용하여 한국 형법 등을 적용, 해상강도
살인, 시체유기,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으로 기소하였다. 1997년 7월 25일, 대법원에서는 주동자인 2등 항해사에게 사형, 나머지 가해자들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 하왕십리동 방화 살인 사건
2010년 10월 21일 오전 3시 30분에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한 아파트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
중학교 2학년생인 만 13세의 이 모군이 아버지가 공부하라고 꾸짖는 데 앙심을 품고 이틀 전부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준비 후 방화하여 일가족 4명을 살해한 존속살해 사건이다
2010년 6월 22일 그 전모가 드러나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살해 암매장
사건으로, 일본의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한 국의 성남 지적장애 소녀 살해 암매장
사건, 군산 초등학생 집단 성폭행
사건 등과 맞먹는 충격적인 미성년자 강력범죄
사건이다.
특히 15, 16세의 중학생 정도의 나이밖에 안되는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이며, 그 과정이 너무나 대담하고 잔혹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2010년 6월 9일 정모(15)군과 최모(15)양과 안모(16)양은 자신들의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15세 여중생을 서울시 홍은동의 한 주택에 4일간 감금하고 잔인한 폭행을 가한 뒤, 김양이 사망하자 이모(19)군을 불러 사체를 훼손한 뒤 한강에 유기한
사건이다
이전부터 김양은 최양과 안양 등과 유흥가를 전전하던 가출 청소년이라는 점에서 친해진 사이였다.
2010년 6월 9일에 최양의 집에서 모여 같이 술을 마시던 중 김양이 두 명이 행실이 나쁘다며 흉을 본 사실이 화제에 오르자, 정군 등은 홧김에 김양을 감금한 뒤 4일동안 잔혹하게 폭행을 가한다. 폭행 과정에서, 100kg가 넘는 거구인 정군은 폭행당하여 쓰러진 김양을 다시 세워놓고 때린다던가, 일부러 급소 부위를 때려 고통을 가한다던가 하는 잔혹성을 보인다. 4일이 지나자 폭행을 견디지 못한 김양은 사망하게 되며, 범인들은 잠시 당황하였으나 곧 평소 알고 지내던 이 모(19)군을 불러내 시신 처리 방법을 논의한다.
이후 시신을 한강에 유기하기로 결정한 그들은, 평소 케이블 TV의 범죄 만화에서 본 장면을 떠올리고, 무게를 줄인다며 시신의 목을 훼손하여 피를 뽑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저지른다. 또한 김양의 영혼이 자신들을 괴롭힐지 모른다며 주머니에 동전을 넣고 이쑤시개에 불을 붙이는 등 간이염(분향)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었다.
이후 인터넷을 이용하여 한강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을 찾은 후, 양화대교부근의 유기 장소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짐이 뭐냐고 묻는 기사에게 태연하게 학교 숙제라고 웃으며 이야기한 것으로 밝혀져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후 경찰의 수사에 의해 체포된 이후에도, 경찰 수사 과정에서도 3명이 똑같이 "김양이 아버지와 싸운 후 갑자기 종적을 감춘 것"으로 입을 맞추는 등 너무나 태연하게 행동하여 수사관들마저도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들은 2010년 10월 22일 청소년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가출 청소년의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으며,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게 된다. 특히 15세밖에 되지 않은 청소년들이 저지른 범죄라 사회적인 충격이 컸다.
항소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항소조차도 그대로 판결났다.
1986∼91에 걸쳐서 경기도 화성군 (지금의 화성시) 일대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 대표적인 영구 미제 사건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하였다.
- 이형호 유괴 사건
1991년 1월 29일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었던 故 이형호 군이 유괴되어 3월 13일 한강공원 잠실지구 인근 배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된 영구 미제 사건. 2007년에 개봉된 그놈 목소리가 이 사건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살던 이형호는 1991년 1월 29일 저녁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서울, 경기 말씨를 쓰는 30대 남자의 협박 전화가 걸려왔으며 43일동안 60여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범인은 마치 각본이 있는 양 철저하게 움직였다. 협박 전화를 처음 걸고 난 뒤에는 경찰에 신고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전화를 걸어 "서초경찰서 형사입니다. 거기 있는 형사들 좀 바꿔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이를 수상히 여긴 강남경찰서 형사의 유도로 이형호의 계모가 "가정집에 무슨 형사가 있나요?"라고 말해 무사히 넘어가는듯 했다.
그러나 범인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찰에 신고했을 경우를 대비해 치밀하게 행동했다. 이형호의 아버지 이우실의 그랜저 승용차에 설치된 카폰으로 연락하면서 서울 시내 곳곳으로 불러내 몸값을 받아내려 했는데, 김포공항 국내선 주차장 2구역에 차를 세운 뒤 차키를 꽂아놓고 바로 600번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 범인은 정작 나타나지 않은채 그날 밤 전화를 걸어 "뒷좌석에 누가 타고 있었습니다."는 변명(?)을 했다. 물론 당시 강남경찰서 형사가 잠복해있었지만, 트렁크에 타고 있었지 앞뒤 좌석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일부러 넘겨짚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범인은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 공중전화를 이용해 이우실의 카폰에 전화를 또 걸어 이번에는 대한극장앞으로 불러냈고, 인근 제과점 건너편에 차를 세운 후 제과점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제과점은 문을 닫은 상태였고, 범인은 즉시 연락해 "제과점 문이 닫혔습니다. 근처에 치킨센터는 열려있으니 그쪽으로 가시죠."라고 말해 지루한 이동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범인은 이형호의 계모에게 "지금 누군가가 주변을 계속 얼쩡거리고 있네요. 경찰에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계속 잡아 떼실건가요?"라고 협박했다. 이 때도 약속장소 주변에 형사들이 잠복해있긴 했지만 모두 일반인이나 상인 등으로 변장한 상태였기 때문에, 역시 범인이 넘겨짚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형호의 계모는 집요한 추궁에 삼촌이 같이 나간 것 같다고 말했고 결국 경찰이 개입했음을 반시인하고 말았다.
이에 범인은 직접 돈을 건네받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 은행 계좌를 개설해 돈을 받기로 한다. 수법은 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뒤 특정 장소에 계좌번호를 적어둔 메모를 남겨 이우실이 그것을 보고 입금하도록 지시하는, 이른바 무인 포스트 방식. 하지만 은행 직원들이 사고 계좌임을 보고 머뭇거리는 사이 범인이 달아나버린데다 해당 지점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 끝내 범인 검거에 실패하고 만다. 물론 통장개설 신청서와 메모지에는 지문이 전혀 없었다.
끝내 돈을 받는데 실패한 범인은 2월 14일 밤 "아이에 대한 애착이 없으시군요. 형호 죽기를 바라죠?"라는 협박을 했고, "88 도로를 타고 가시다보면 서울교라고 다리가 있습니다. 거기 밑에 철제박스가 있고 메모를 돌로 눌러놨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인줄 알고 잘 진행해주십시오."라는 최후통첩을 해왔다. 메모의 종착점은 양화대교 인근 철제박스였고 이우실은 이 곳에 가짜 돈이 든 봉지를 둔채 떠났다. 주변에는 형사들이 잠복해 있었고 잘하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였지만, 이번에는 무전기로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철제박스의 위치를 혼동하는 바람에 범인이 돈을 집어갈 동안 형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 날 밤 범인은 전화를 걸어 "가짜 돈이 잔뜩 섞여있습니다. 형호를 되찾길 바라지 않는 것으로 알죠. 다만 경찰에 신고하지 않으신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남긴채 연락을 끊어버렸다.
범인의 마지막 통화로부터 한달이 지난 1991년 3월 13일. 한강공원 잠실지구 인근 터널(일명 토끼굴) 옆 배수로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확인 결과 유괴된 이형호였고, 부검 결과 위에 남아있는 음식물이 실종 당일 친구네 집에서 먹은 음식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사망 시점은 유괴된 직후로 추정되었다. 당일 살해했으면서 계속 금품 요구 협박 전화를 했다는 점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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