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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공유/세계사

태평양 전쟁사. 유일하게 미군 사상자가 더 많았던 이오지마 전투

 

 

태평양 전쟁 중 가장 많은 인명 피해가 나왔으며 가장 많은 PTSD 환자가 나온 최악의 전투.


"바다가 3할, 적이 7할!"
― 미 함대를 발견한 일본군 초병의 보고


1945년 2월 19일 ~ 1945년 3월 26일 작전명. Operation Detachment(분리 작전)





이오지마는 본래 별 볼일 없는 손바닥만한 화산섬이었지만 필리핀 전역을 빼앗기고 레이테 만 해전에서 대패한 이후 사실상 제해권과 제공권을 미군에게 내준 일본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되버린 곳이다.


우선 지리상으로 일본 본토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며 여기서 B-29 폭격기가 뜬다면 본토 전체가 잿더미가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뭐 안그래도 이미 도쿄는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

따라서 이 곳을 요새화하여 미군의 진격을 잠시나마 저지시키고 또한 본토로 날아오는 미군 항공기들의 항로상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대본영에선 이 곳의 전력을 증강하기 시작한다.



여지껏 미군과 일본군이 태평양에서 벌인 전투들을 보다보면 적게는 3:1. 심하면 20:1 까지 사상자 수가 차이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비상식적인 사상자 교환비엔 일본군이 벌인 여러가지 뻘짓과 요인이 있지만 가장 문제시 되었던 건 바로 전투 방식의 차이였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기울게 된 분수령이었던 과달카날 전투 이후부턴 주로 미군이 공격 일본군이 방어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데 당연하지만 자연적으로 요새화 된 화산섬들이 즐비한 태평양에서의 지상전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방어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게끔 진행되는게 맞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달랐다.

해변을 내주는 것 → 노답. 패배. ' 군대는 상륙하는 순간이 가장 취약하다 ' 는 논점에 따라 상륙정이 다가올때까지 해안을 지키다 적군이 모습을 보인 그 순간 공격한다는 사고를 하고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상륙하는 순간이 가장 취약한 건 맞다.

하지만 이건 디에프나 노르망디처럼 쌍방의 전력, 화력이 어느 정도 비등할때나 통하는 전술이지

한쪽의 화력이 압도적일때 해안에서 어물쩡 거리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지휘관들은 여전히 악마의 성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자연요새인 화산동굴을 버리고 모든 중화기 및 포화, 주력을 해변에 파놓은 참호로 집중시켰으며 덕분에 미군은 상륙 전 몇일간 대규모 함포 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일본군 주력의 대부분을 제거 후 여유롭게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평야에서 흙을 파 구축한 참호도 이 시기 쯤 되면 강력한 중전차로 인해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는데 하물며 점도가 약한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해변가에 파놓은 참호가 오죽하랴 ...


그렇게 주력이 섬멸당하고 상륙하는 미군에 대해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 한채 섬 내부로 쫒겨들어가면 그때부터가 전투 시작이었다.

얼마 되지 않던 미군 사상자의 전부는 모두 이 섬 내부에서의 난전에 의해 발생한 것.

더더욱 기가 찬 것은 일본군의 전술이다. 융통성이란게 없었다.

오로지 야습. 야습에 이은 야습 그것뿐이었다.

결국 최후에 남은 한줌의 병력들이 착검 후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미군 진영에 반자이 어택을 찍는 것으로 전투가 종결되는 식이었다.


일본군의 지휘체계라든가 무기, 경제 이런 국가적인 역량을 모두 빼고 보아도 하급장교부터 병사들까지 이미 일선에선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연출하고 있었던 것.




하지만 이오지마에선 그러한 전투 방식이 대폭 바뀌게 된다.

 

 

 

 

이오지마 방어군 사령관으로 오게 된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육군 중장.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으며 젊은 시절엔 미 육사에 유학했고 대사관 근무 경력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미국의 산업, 군사적 역량이 어느 정도 되는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오지마 섬 방어전 또한 강요된 자살 행위임을 알고있었다.


실제 이오지마 섬에 파견 된 109사단은 거국적인 방어계획이라 보기엔 21,000명으로 병력도 부족하고 타 부대 잔병들을 부랴부랴 긁어모은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내주고 그 동안 어찌어찌 연명해왔던 잠수함을 통한 보급 또한 대본영으로부터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뒤 어차피 모두 희생해야한다면 자신의 조국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하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이 섬에서 미군의 출혈을 최대한 강요하며 진득이 시간을 끌어주고 또한 미군에게 현실에 강림한 지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한 트라우마를 심어주는데 목적을 두었다.


그에 따라 그가 섬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한창 공사중이던 해변가의 참호라인을 모두 부수는 것이었다.

전 병력을 모두 섬 가운데 위치한 수리바치 산으로 이동시켰으며 모든 화망에 대해 이 산을 거점으로 재구축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여기저기 얽혀있던 동굴을 뚫어 산 내부를 마치 미로처럼 만들어 놓았으며 철저한 통신망 구축으로 자칫 개인플레이 하기 딱 좋은 포지션들을 직접 통제했다.


여담으로 이때 구축해놓은 방어진지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지어졌다.


또한 일본군의 고질병이던 반자이 어택 및 자결을 철저히 금지했다.

쓸데없이 나가 죽기보단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저항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미군은 여지껏 태평양에서 봐 온 일본군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게된다.

 

 

 

상륙하는 미군.


미 해병대는 해군에 상륙전 일주일간의 상륙준비 포격을 요청했으나 해군은 전함의 주포탄 적재량 문제로 난색을 표하였고 이 때문에 해병대 상륙 지휘부와 함대사령부간 몇 일씩 고성이 오갔다.

결국 상륙준비포격이 3일간 이루어졌지만 이 정도의 포격으론 일본군이 구축해놓은 산 속의 요새에 대해 피해를 전혀 줄 수 없었다.

물론 이 3일간의 포격도 엄청나게 치열했다.

8인치 함포부터 20mm 기관포까지 총탄이 발사되는 건 모두 다 동원해 섬이 통째로 가라앉아 버리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었으며 그야말로 포탄으로 온 섬을 다 뒤엎어버렸으니 만약 일본군이 기존 방식대로 해안가에 있었다면 분명 이 3일안에 전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굉장히 안일한 생각을 하고있었다.

전투는 일주일정도면 끝날 것이며 상륙 후 야간에 기습해 올 일본군만 처리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상륙이 시작되었는데 어라? 상륙하는데 공격이 없네?

심지어 밤에 시작 될 반자이 어택에 대비해 뜬 눈으로 밤을 새는데도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상륙군 지휘관인 홀랜드 스미스 장군은 함포 사격으로 일본군이 모두 잿더미가 됬나보다하고 진지 구축을 지시했고 상륙군의 거의 대다수가 화산재같은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지던 그 시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치열했던 개전 첫날 미 해병대는 무려 2,5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전열을 이탈했고 당시 전황보고를 받던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이 충격적인 소식에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고 한다.


물론 일본군 또한 사상자 6,000명이 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암만 진지구축을 잘 했다 한들 이미 병력에서 3배가 차이나고 군수물자의 보급도 없었기 때문에 전투 개시 몇 시간만에 중화기용 총포탄을 모두 소진했다. 그때부터 미군에게 해안을 완벽히 내주게 되었고 백병전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군은 두더지같은 일본군을 잡기위해 화염방사기를 적극 활용했다.

동굴속에 꽁꽁 숨어있던 일본군 사상자의 대부분은 이 화염방사기에 의해 일어났고 미군은 또한 공병부대를 동원해 TNT로 동굴을 폭파해버리거나 불도저를 끌고 와 일본군이 있을만한 곳을 아예 메워버려 생매장 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 이오지마 전투에선 포로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군이나 미군이나 서로를 포로로 잡을 만한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애당초 항복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백병전은 매우 참혹하게 진행되었다.

미군은 위 서술한 내용과 같이 일본군을 철저히 쓸어버리는데 주력했고 미군만큼의 중화기를 보유하지 못한 일본군은 섬내 가득한 유황가루를 이용해 화염병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산 내부를 수색하는 미군을 태워죽였다.


일주일이면 끝난다는 전투가 한달이상 지속되며 그야말로 난전속의 지옥도가 펼쳐지자 양 측 병사들은 심각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게되었다.

특히 이 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겪어보지 못 한 미군 신병들이 심했으며 스스로 자살하는 병사들도 생겨났다.



결국엔 미군이 섬 최북단까지 점령하며 승리하긴 했으나 그 승리의 대가가 너무나 컸다.

일주일이면 끝날거란 전투가 한달 넘게 이어지며 미군은 상륙군 11만 직접 전투에 참가한 전투병 7만 중 전사자 6,821명 부상자 19,189명 실종 494명의 피해를 냈다.


일본군은 전투에 참가한 109사단 21,000명 중 216명을 남기고 모두 전사했다.

그나마 남은 216명은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스스로 죽을 힘도 없는 중환자들밖에 없었다.

전사자 수는 일본군이 많지만 부상자를 합친 인명 피해는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지상전에서 처음으로 미군의 인명 피해가 일본군의 인명 피해보다 많았던 전투이다.


쿠리바야시 중장은 자신들의 분투로 인해 일본과의 전쟁에 넌더리가 난 미국이 협상 테이블에 응할 것으로 기대하고 자신 또한 이오지마에서 전사했지만 이 전투에서 제대로 데인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결국 원자탄이라는 필살기를 꺼내고 만다.

 

 

퓰리쳐 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사진은 이오지마 섬 수리바치 산 정상에서 찍은 것이다.

이 성조기를 계양했던 6명의 병사들 중 3명은 당일 전투 중 전사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은 미국, 일본 할 것 없이 모두 끔찍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오지마가 점령됨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공습할 B-29의 최전방 기지이자 피격기, 혹은 재보급기를 위한 중간 기착지를 얻게 되었고, 점령 이후 본격적인 일본 본토 공습가하게 된다. 미군의 이오지마섬의 확보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오지마 점령 이후 오키나와 공략전 전진기지의 획득과 함께 기존에 티니안이나 사이판에서 B-29 폭격기의 항속거리 문제로 인한 폭장량의 제한이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포함하여 손실되는 B-29 폭격기나 승무원의 희생이 줄어들게 되었고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폭격기의 공습을 경고해줄 수 있는 경보망이 무너져버려 본토폭격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특히나 피격 및 기체 고장으로 불시착하는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 섬 덕분에 구원받았다. 결과적으로 이 섬은 수많은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다만 폭격기 조종사와 승무원이라고 해서 전사한 해병대원들보다 목숨의 가치가 더 높은 것은 아니므로,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이오지마 전투의 의의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는 입장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필수적인 전략 거점이라는 점도 있고 본토 상륙에 교두보이자 진격할 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점령했어야 한다는 의견이 매우 강하다. 처음부터 핵을 쏘지 않는 한 통상작전으로는 반드시 공략해야 했을 것이다.


전투의 처절함 때문에 흔히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가공 매체의 주요 무대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전쟁 영화에 비해서 더더욱 반전 성향이 강한 작품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쿠리바야시 장군이 집으로 보낸 편지를 묶어서 쓴 책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그리고 소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기반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과 이 영화와 동시에 찍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등.

 

 

 

출처 : http://cafe.naver.com/dieselmania/10637644